열여섯 어린 신부를 맞이한 것은 넉넉한 곳간이 아니라 단칸방의 고단한 살림이었습니다. 시부모님과 시외사촌까지 한 지붕 아래 모셔야 했던 시절, 봄마다 찾아오는 보릿고개에 곡식이 떨어지면 산에 올라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송구죽을 쑤어 넘겨야 했습니다. 그 모진 세월 속에서도 어머니는 시부모님 상에 윤기 나는 쌀밥을 정갈하게 올려 드리고, 당신은 거친 보리밥과 송구죽으로 주린 배를 달래셨습니다. 번듯한 상 하나 없이 방구석으로 돌아앉아 남몰래 수저를 뜨시던 어머니는 시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도 삼 년 동안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며 지극한 효성을 다하셨습니다.

젊은 날의 아버지 역시 시대의 거센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셨습니다. 일제강점기 사할린 탄광으로의 강제징용과 만주 간도로 떠났던 험난한 돈벌이의 길을 거쳐 간신히 고향 땅을 밟으셨지만, 타국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큰아버지 내외의 비보는 가슴속에 커다란 못으로 박혔습니다. 아버지는 피눈물을 삼키며 홀로 남겨진 어린 질녀를 친자식처럼 거두어 품에 안아 키우셨고, 훗날 어엿하게 혼처를 찾아 시집을 보내며 혈육에 대한 무거운 도리를 다하셨습니다.

부모님이 조상께 물려받은 밑천이라곤 내근재의 밭 200평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흙을 대하는 부모님의 손끝은 밤낮을 몰랐습니다. 어머니는 품앗이 일꾼들의 밥상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대식구의 끼니를 차려내느라 손마디가 닳고 굳은살이 박였고, 아버지는 담배농사며 소상점, 석유 장수, 소달구지 짐꾼까지 돈이 되는 일이라면 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셨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깊은 밤, 벼 가마니를 가득 싣고 용전천 하천변을 달릴 때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산짐승들의 시퍼런 눈빛이 번뜩이곤 했습니다. 오싹한 밤길을 헤치며 소달구지를 몰던 아버지의 채찍 소리와, 마당 끝에 등불을 밝혀두고 남편의 무사 귀환을 빌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모여 마침내 가난의 두터운 벽을 허물어뜨렸습니다. 남들은 갈퀴로 돈을 긁어모은다 하여 칼쿠리 안노댁이라 불렀지만, 그것은 뼈를 깎는 절약과 남모르는 피땀의 결실이었습니다. 밭 200평으로 시작한 살림은 어느새 논 1,200평과 밭 3,000평으로 불어났고, 자수성가한 안노댁은 마을에서 손꼽히는 든든한 집안으로 우뚝 섰습니다.

인생의 거센 풍랑은 자식의 일로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사업 실패로 평생 일군 토지가 압류될 위기에 처했을 때, 큰누님의 눈물겨운 헌신과 온 가족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빚을 모두 갚아내며 가문의 터전을 지켜냈습니다. 훗날 토지가 수몰되어 보상금을 받았을 때도, 소문이라도 날까 두려워 은행 문을 찾지 못하시고 안방 나무 선반 위 싸리로 만든 옷상자 깊숙한 곳에 피땀 어린 돈을 묻어두셨습니다.

철부지 자식들이 몰래 동전을 꺼내 과자를 사 먹곤 하던 싸리 옷상자는 단순한 돈궤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은 당신들을 위해서는 옷 한 벌, 신발 한 켤레 허투루 쓰지 않으시면서도, 아들 셋을 대도시로 유학 보내 공무원과 대기업의 든든한 일꾼으로 키워내셨고 두 딸 역시 올바르고 꼿꼿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 상자는 바로 부모님의 거룩한 사랑의 곳간이었습니다.

딸을 시집보내던 날, 화물차 가득 혼수를 실어 보내며 차마 자식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못해 뒤돌아서서 소맷자락으로 눈시울을 훔치시던 아버지였습니다. 딸이 국민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아 산골 오지로 떠났을 때도, 먼지 날리는 비포장길을 단숨에 달려가 슬레이트집 작은 방 한 칸을 얻어 손수 도배를 해주시며 딸의 보금자리를 바라보고 흐뭇하게 웃으시던 분이었습니다. 고된 농사일로 뼛속까지 저려오는 저녁에도, 늦게 하교하는 딸들이 행여 길을 잃을까 걱정되어 4킬로미터가 넘는 밤길을 초롱불 하나 들고 마중 서 계시던 어머니의 사랑은 자식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등불로 남았습니다.

평생 자식들의 앞길을 환히 비춰주시던 두 분의 눈시는 세월 앞에 서글프게 흐려져 갔습니다. 어머니는 모진 고생과 밤길 마중의 눈물 세월로 냉장고 속 상한 음식조차 분간하지 못하셨고, 아버지 역시 뇌출혈 오진으로 골든타임을 놓쳐 한쪽 눈의 빛을 잃으셨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세상의 온갖 어둠을 헤쳐 오신 부모님이 정작 노년에는 어둠 속에 갇히셔야 했던 그 아픈 모습은, 지켜보는 자식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노호택, 한실댁, 덕산댁, 가호댁, 노실댁, 선호댁, 이호댁… 용전천 물길을 따라 이웃들과 살뜰한 정을 나누며 사시던 아버지는 여든넷의 나이에 마지막 숨을 고르셨습니다. 평생을 함께 고생한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으셨던지, 임종의 길목에서 어머니의 손을 꼭 쥐고 나지막이 이르셨습니다.

"딱 3년만 있다가 오소."

그 애틋한 약속을 지키려는 듯, 4년 뒤 아버지는 하늘나라에서 어머니를 부르시어 마침내 두 분은 영원한 안식처에서 다시 두 손을 맞잡으셨습니다.

해마다 음력 10월, 마을 남쪽 끝 봉은정에 모여 문중의 묘사를 지낼 때마다 자식들은 가슴 깊이 깨닫습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물려주신 참된 유산은 수천 평의 논밭이 아니라, 송구죽을 넘기면서도 꺾이지 않던 굳은 의지였고, 4킬로미터 밤길을 지켜주던 따스한 등불이었으며, 죽음조차 갈라놓지 못한 두 분의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용전천 푸른 물길 곁에서 일구신 안노댁 싸리 옷상자의 숭고한 피땀과 사랑은, 우리 자식들의 삶 속에 영원히 지지 않는 빛으로 흐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