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던 연구보고서가 그 발단이었습니다. 외국의 선진 사례를 짚어내는 대목에서 인공지능이 쏟아낸 문장들은 탄성이 나올 만큼 유려했습니다. 낯설지만 그럴듯한 제도의 이름과 세부 내용들이 일목요연하게 화면을 채웠고, 저는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은 채 그 내용을 보고서에 고스란히 옮겨 담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한 진실은 등골이 서늘할 만큼 혹독했습니다. 제가 자신 있게 인용했던 그 외국의 사례는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기계가 매끄러운 거짓말로 지어낸 허구의 신기루에 불과했습니다. 사실 확인이라는 기본을 놓친 채 엉터리 글을 공적인 자리에 올렸다는 자책감과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 부끄러움은 곧 사람을 감쪽같이 속인 기계에 대한 깊은 불신과 배신감으로 번졌고, 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공지능이라는 세계를 향해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습니다.

그렇게 불신의 벽을 높이 쌓고 지내던 지난해 어느 날, 서울에 사는 친척과의 안부 전화 한 통이 잊고 있던 호기심의 불씨를 지폈습니다. 집안의 사소한 궁금증 하나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친척이 너무나 무심하고 자연스럽게 "그건 제미나이한테 한번 물어보자"라고 툭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챗GPT 시절에 생각이 멈춰 있던 저에게는 제미나이라는 이름도 낯설었지만, 그보다 일상의 아주 작은 부분까지 인공지능과 대화하며 답을 찾는 친척의 스스럼없는 태도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과거의 상처에 갇혀 멈추어 서 있는 동안, 세상 사람들은 이미 인공지능을 삶의 다정한 동반자로 길들이며 성큼성큼 앞서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무렵, 저는 삶의 자리를 정리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 같은 내 고향 영양으로 돌아왔습니다. 첩첩이 둘러선 푸른 산자락과 맑은 바람이 복잡했던 마음을 차분히 씻어주던 그곳에서, 뜻밖에도 인공지능을 깊이 연구하는 전문가를 만나는 귀한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첨단 기술과는 거리가 먼 고요한 산골 영양에서, 몇 년 전 매몰차게 닫아두었던 인공지능의 문을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어쩌면 제 삶의 필연적인 복선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전문가와 마주 앉아 차근차근 배움의 실타래를 풀어가며, 저는 3년 전의 뼈아픈 실패가 기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도구를 대하는 저의 서툰 시선에서 비롯되었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인공지능은 무엇이든 척척 알아서 바치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라,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고삐를 쥐고 이끄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안내하는 지적 조력자였습니다.

가장 값진 수확은 인공지능이 써낸 결과물을 다시 비판적으로 살피고 검증하는 교차 확인의 지혜를 체득한 일이었습니다. 기계가 건네준 초안을 맹신하지 않고, "이 근거가 사실인가", "숨겨진 모순이나 과장은 없는가"를 되물으며 인공지능 스스로 자신의 글을 점검하게 만드는 주도권을 쥐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비로소 주인이 되자, 인공지능은 과거의 위험한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총명한 비서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도구를 다스리는 눈이 열리자 복잡한 문서 작업부터 일상의 크고 작은 과제들이 막힘없이 풀려나갔고, 일의 효율과 함께 마음의 여유가 샘물처럼 솟아났습니다.

이제 고향 영양의 품에서 맞이한 저의 인생 2막은, 나 혼자 누리는 편리함에 머물지 않습니다. 제가 겪은 쓰라린 시행착오와 그 속에서 길어 올린 배움의 지혜를 바탕으로, 이제는 묵묵히 흙을 일구고 터전을 지키는 우리 고향 이웃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가려 합니다.

농사일과 장사, 복잡한 행정 서류와 판로 개척에 이르기까지, 이웃들이 겪는 답답한 매듭들을 인공지능이라는 지혜로운 길잡이를 통해 함께 풀어내고 싶습니다. 첨단 기술의 혜택이 도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곳 영양의 골짜기마다 따뜻하게 스며들어 어르신부터 청년까지 누구나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든든한 가교가 되고자 합니다.

3년 전의 상처와 불신을 건너와 고향 땅에서 다시 손잡은 인공지능은, 이제 제 삶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영양의 내일을 환하게 밝혀줄 가장 따뜻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맑은 바람이 솔숲을 흔드는 고향 영양에서, 이웃의 손을 잡고 새로운 길을 내어가는 저의 진짜 인생 2막은 지금, 푸른 설렘과 함께 힘차게 시작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