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하루는 정식 출근 시간 전부터 시작되는 날이 많았다. 도로변 풀베기 작업이 있는 날이면, 날이 밝기 전 오토바이에 막걸리 한 말을 싣고 담당 마을로 갔다. 마을회관 앰프 방송을 하면 주민들이 낫을 들고 하나둘 모여들었다.
나는 오토바이에서 막걸리 통을 내려놓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일찍 나오셨네요. 막걸리 한잔 하이소.”
그러면 주민들도 반갑게 맞아주셨다. 막걸리 한잔을 나누고 함께 도로변 풀을 베다 보면 어느새 출근 시간이 가까워졌다. 그런 날은 풀잎과 흙이 묻은 옷을 털고 서둘러 면사무소로 돌아오곤 했다.
새벽 출장이 없는 날에는 출근길에 직원들과 면사무소 근처 다방에 들렀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그날 해야 할 일과 담당 마을의 일을 이야기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가끔 면장님이 다방에 나오셔서 커피값을 계산하시며 “오늘도 열심히 해보자”고 격려해 주셨다. 그 한마디가 직원들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낮이 되면 면사무소에 앉아 서류만 볼 틈이 없었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과 들녘으로 나갔다. 그 시절에는 쌀 생산량을 늘리는 식량증산이 중요한 일이었고, 통일벼 재배를 권장하는 일도 맡았다.
말로만 권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바지를 걷어붙이고 논에 들어가 벼 사이에 난 피를 뽑기도 했다. 어느 날 농민 한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 서그가 우리 논에 들어가 피를 뽑아주니, 내가 미안해서 가만있을 수가 없네.”
그 말씀을 들으면 손톱 밑에 흙이 끼고 허리가 아파도 힘이 났다. 공무원이 주민들과 함께 논에 들어가 땀을 흘리는 모습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했던 것 같다.
봄철에는 병충해를 막기 위해 논두렁과 밭두렁 태우기를 독려했다. 마른 풀을 태우는 일이었지만 바람이 불면 불길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번지기도 했다. 밭뚝에 쌓아둔 볏짚 가리에 불이 붙는 일도 있었다. 그때면 주인이 달려와 화를 내고, 우리는 실수를 봐 달라고 거듭 사과해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개인 돈으로 볏짚 값을 보상하기도 했다. 들판에서 하는 일은 늘 조심해야 했고,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봄가을 건조한 철이 되면 산불도 큰 걱정거리였다. 산불이 났다는 연락을 받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물을 담은 등짐펌프를 메고 가파른 산비탈을 올라가 연기를 마시며 불을 껐다.
큰 산불이 나면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현장 가까운 마을회관에서 쪽잠을 자다가, 바람이 잠잠해지는 새벽이면 조별 진화팀을 편성해 사방으로 나누어 산에 올랐다. 바람이 잦은 새벽이 불길을 잡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연기와 재를 뒤집어쓰고 펌프질을 하다 보면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면사무소의 급한 일을 처리하느라 산불 현장에 늦게 도착하는 경우에는 군수가 고함을 치고 거친 폭언을 하는 일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힘들고 서러운 일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불을 빨리 끄고 주민들의 산과 밭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현장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는 도로변 환경을 정비하고 아름다운 공원을 조성하여 손님맞이 분위기를 잘 갖추라는 정부 방침이 내려왔다. 이에 따라 도로변에 작은 소공원을 만들기 위해 직원들이 직접 나섰다.
하천에서 돌을 모아 나르고, 산에서 야생 진달래를 캐 오기도 했다. 논밭둑에 있던 꽃나무와 주민들이 기증해 준 과수나무도 한 그루씩 옮겨 심었다. 그렇게 길가 소공원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하천변에 버려진 비닐을 줍고, 논밭의 폐비닐을 걷어내며 농경지 주변 쓰레기를 수거했다. 마을을 깨끗하게 가꾸는 일도 당시 공무원들의 중요한 일이었다.
담당 마을 출장은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깊은 오지마을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하루 만에 일을 보고 돌아오기 어려웠다. 그럴 때는 마을 이장님 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저녁밥을 함께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장님은 마을 사람들의 성향과 집안 사정을 들려주셨다. 누가 어떤 일을 어려워하는지, 어느 집에 무슨 형편이 있는지 알게 되면 다음에 마을 일을 처리할 때 많은 도움이 되었다. 좁은 방에서 잠을 자는 일이 불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주민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이해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해마다 농사가 잘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흉년이 든 해에는 농민들의 어려움이 커졌고 농민회 활동도 활발했다. 농민들이 대도시로 상경해 시위를 하거나 군청 마당에서 농산물을 태우며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때에는 직장예비군을 동원해 청사를 지키고, 농민회 회원들의 활동 상황을 살펴 동향을 보고하기도 했다. 시위가 벌어지면 몸으로 막아서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평소에는 논에서 함께 일하고 막걸리도 나누던 주민들이었기에, 서로 마주 서야 하는 상황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맡은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임했다.
그 시절에는 가정보다 직장이 먼저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했다. 일이 밀리거나 비상이 걸리면 밤 12시가 넘어 퇴근하는 일이 잦았다. 늦은 퇴근길에 상사가 “서 주사, 한잔하고 가세”라고 하면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술집에 들러 막걸리 한잔을 나누며 하루의 피로를 풀기도 했다.
몸은 늘 고단했지만, 국가와 지역을 위해 중요한 부서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 불평보다는 보람을 먼저 생각했다. 하지만 밤늦게 들어오는 남편과 아빠를 기다려야 했던 가족들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고 섭섭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은 “고생 많으셨어요” 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가족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크다. 왜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지, 왜 가정보다 직장을 앞세웠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래도 주민들과 함께 들판을 누비고, 산불 현장에서 밤을 새우고, 마을의 길가를 깨끗하게 가꾸었던 그 시절은 내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시간이다. 힘들었던 만큼 보람도 컸고, 1980년대 공직 생활의 하루하루는 지금도 나에게 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