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요즘 아이들은 에어컨 바람 시원한 거실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지만,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우리 집 저녁 식탁은 늘 마당 한가운데에 차려지곤 했다. 서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푸르스름한 땅거미가 내려앉을 때면, 어머니는 마당 한복판에 볏짚으로 짠 널따란 멍석을 펴셨다. 그 위에 오른 밥상은 더없이 소박했다. 된장찌개 한 뚝배기에 텃밭에서 갓 뜯어온 풋고추와 상추가 전부였지만, 마당을 스쳐 지나가는 여름 저녁 바람을 반찬 삼아 넘기는 밥맛은 세상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 달고 푸근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어스레한 마당은 그대로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사방에 어둠이 짙게 깔릴 무렵이면 어디선가 반딧불이가 깜빡이며 날아들었다. 우리는 녀석들을 개똥벌레라 불렀다. 작은 불빛 하나가 마당 위를 고요히 유영하면, 아이들은 숨을 죽인 채 그 가녀린 빛을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평상에 등을 대고 벌렁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무수한 별들이 은하수를 이루고 있었다.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손가락을 꼽아가며 별을 헤아리다 보면, 어느새 밤공기에 스르르 눈이 감겨 어머니의 따스한 무릎을 베고 깊은 잠에 빠져들곤 했다.
그 시절 우리 마을 집들은 대부분 정겨운 초가지붕을 얹고 있었다. 돌과 흙을 정성스레 이겨 쌓은 흙담 너머로는 집집마다 고목 감나무가 넉넉하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주황빛 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온 동네를 따뜻하게 물들이곤 했다. 집과 집 사이를 잇는 고즈넉한 골목길에는 해마다 여름이면 붉은 봉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동네 아이들은 너나없이 봉숭아 꽃잎과 푸른 잎사귀를 듬뿍 따다가 납작한 돌로 곱게 짓찧었다. 백반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라, 그저 꽃과 잎을 그대로 찧어 작은 손톱 위에 소복이 얹고는 피마자 잎으로 감싸 실로 꽁꽁 동여매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가슴을 졸이며 실을 풀었을 때 발그레하게 물든 손톱을 마주하면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 서로 손을 맞대어 자랑하곤 했다. 첫눈이 올 때까지 그 붉은빛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는 훗날에야 알았지만, 그 수줍게 물든 손톱은 가난했던 우리 유년 시절이 남긴 가장 곱고 순수한 빛깔이었다.
마을 앞에는 사시사철 맑은 소하천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흘렀다. 아침이고 낮이고 개울가에 나가면 경쾌한 빨래 방망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동네 어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흐르는 맑은 물에 빨래를 치대고 헹구며 도란도란 세상 사는 정을 나누었다. 개울은 어머니들의 고단한 일상을 씻어내는 터전이자, 마을의 온갖 희로애락이 오가는 가장 다정한 사랑방이었다. 우리가 마시는 물은 마을 공동 우물에서 길어다 먹었다. 아침 일찍 물지게를 지고 우물가로 가 두레박을 깊은 물속으로 던지면, 끼익거리며 차고 맑은 물이 길어 올려졌다. 이를 물동이에 담아 부지런히 집으로 날라 마당 한편에 자리한 커다란 장독에 가득 채워두고 표주박으로 떠 마셨다. 뙤약볕 아래서 밭일을 마치고 돌아와 장독 뚜껑을 열고 단숨에 들이켜던 그 우물물 한 바가지의 서늘한 시원함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가슴속 깊은 곳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라 우리 집의 밤을 밝히는 것은 오직 호롱불 하나뿐이었다. 귀한 기름을 한 방울이라도 아끼기 위해 두 방 사이의 벽을 터서 호롱불 하나를 그 사이에 올려두곤 했다. 그 희미한 불빛 하나를 가운데 두고, 건너편 방에서 누님들이 밤이 깊도록 책장을 넘기며 형설지공의 배움을 이어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을음이 피어오르는 작은 불빛 아래였지만, 배움을 향한 열망만큼은 세상 어느 등불보다 환하게 타올랐다.
그 시절 우리 집에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석유를 팔기도 했다. 해가 질 무렵이면 동네 주민들이 커다란 1.8리터 소주 됫병을 하나씩 들고 석유를 사러 찾아오곤 했다. “석유 한 병 주소.” 큰 드럼통에 얇은 고무호스를 넣고 반대쪽 끝을 입으로 순간 훅 빨아들여 압력을 만든 뒤, 재빨리 됫병 입구에 꽂아 넣었다. 자칫 타이밍을 놓치면 쌉싸름하고 독한 석유가 입안으로 훅 들어와 혀끝을 아리게 하기도 했다. 기름이 가득 차면 뭉툭한 코르크 마개로 입구를 꼭 눌러 막아 손에 쥐여주었다. 어스름한 저녁 마당에 감돌던 특유의 석유 냄새와, 됫병을 가슴에 품고 돌아가던 이웃들의 발걸음은 유년의 기억 속에 각인된 가장 또렷한 풍경 중 하나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불편하고 가진 것 없는 나날들이었다. 수도꼭지만 틀면 맑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도 아니었고, 스위치 하나로 어둠을 몰아내는 형광등도 없었다. 하지만 흙담 길을 걸으며 봉숭아 꽃잎을 따고, 시원한 우물물 한 바가지에 목을 축이며, 밤이면 멍석에 누워 반딧불이와 별을 헤아리던 순수한 날들이 있었다. 물질은 부족했으나 마음은 한없이 넉넉했던 그 시절의 따스한 풍경들이 오늘날의 나를 지탱해 준 삶의 첫 뿌리였다.
소몰이와 감자 삼굿
그렇게 마당에서 별을 헤아리던 소년 시탁이는 어느덧 자라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요즘 아이들은 알록달록한 가방을 메고 스쿨버스나 부모님의 차를 타고 편안하게 학교를 오가지만,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에는 번듯한 책가방이라는 것 자체가 귀했다. 어머니가 챙겨주신 책보자기에 교과서 몇 권과 양은 도시락을 나란히 넣고 네 모서리를 야무지게 묶어 가슴 앞으로 대각선으로 질러 매거나 허리에 단단히 둘러맸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등 뒤에서 달그락거리며 부딪히는 숟가락과 양은 도시락 소리는 매일 아침 우리의 경쾌한 등교 행진곡이었다.
학교까지는 줄잡아 2킬로미터가 넘는 먼 길이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논두렁길과 신작로를 따라 걷다 보면 동네 친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여름날 쏟아지는 소나기도, 겨울날 살을 에는 찬 바람도 우리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을 치며 걷다 보면, 그 길던 2킬로미터 길도 어느새 학교 교문 앞까지 훌쩍 줄어들어 있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느긋하고 자유로웠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다가 마을 앞 하천에 다다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걸음을 멈췄다. 더운 여름날이면 책보자기를 둑방에 팽개쳐두고 옷을 훌훌 벗어던진 채 맑은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고 멱을 감으며 물장구를 치다 보면 하루의 피로가 물살을 따라 순식간에 씻겨 내려갔다. 입술이 파래지고 손발이 붇도록 물놀이를 즐기고 나서야, 저녁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돌아왔다고 해서 하루의 일과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책보자기를 마루에 던져놓기 무섭게 외양간으로 가 소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 소에게 싱싱한 풀을 배불리 먹이는 것은 시골 아이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몫이었다. 동네 동무들도 저마다 집의 소를 몰고 뒷산으로 모여들었다. 산에 도착하면 소를 일일이 붙잡고 서 있을 필요가 없었다. 긴 소 몰이 끈을 양쪽 소뿔에 단단히 감아두고 산자락에 그냥 풀어놓았다.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동안 우리만의 진짜 놀이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산자락 한편에 구덩이를 파고 자갈돌을 모아 삼굿을 만들었다. 집에서 몰래 챙겨온 감자를 넣고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지폈다. 돌이 빨갛게 달아오르면 흙과 풀을 덮어 뜨거운 연기와 열기를 가두었다. 한참을 기다린 뒤 흙을 걷어내면, 구수한 냄새와 함께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새까맣게 그을린 뜨거운 감자를 손에서 손으로 옮겨가며 호호 불어 껍질을 벗겼다. 그 포근하고 달콤한 맛은 세상 그 어떤 귀한 음식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유년의 별미였다.
감자를 구워 먹고 산과 들을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덧 해는 서산 너머로 뉘엿뉘엿 기울었다. 산자락에 짙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저 멀리서 부지런히 낫질을 하시던 할아버지의 굽은 등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소가 밤새 먹을 신선한 풀을 이미 한가득 베어, 짚으로 둥글게 엮은 커다란 풀망태에 넘치도록 채워두셨다. 비록 어린 나이였고 몸도 작고 쇠약했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수고를 덜어드리고 싶어 그 묵직한 풀망태를 등에 짊어졌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차올랐지만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스름한 산길을 할아버지와 나란히 걸어 내려오던 그 고요한 저녁길. 소 목에 달린 방울 소리와 할아버지의 듬직한 발자국 소리가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되어 나를 지켜주었다.
그 시절 우리 집 처마 밑에는 둥근 토종벌통들이 정답게 줄지어 놓여 있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불어 벌들이 새로운 무리를 짓는 분봉 철이 되면 마당은 한바탕 조용한 긴장감으로 술렁였다. 새 여왕벌을 따라 수천 마리의 벌 떼가 웅웅거리며 날아올라 마당의 감나무나 호두나무 가지에 까맣게 뭉쳐 앉았다. 그럴 때면 나는 쑥을 뜯어 연기를 피우고 커다란 박바가지를 챙겨 조심스레 나무 위로 기어올랐다. “니캉내캉 살자, 니캉내캉 살자.” 마치 오랜 벗에게 말을 건네듯 나지막이 읊조리며 쑥 연기로 벌들을 달랬다. 그러고는 여왕벌과 일벌들을 박바가지에 살포시 쓸어 담아 새 벌통에 안착시켰다. 그렇게 우리 집 처마 밑에는 해마다 정겨운 식구가 하나둘 늘어났다.
찬 바람이 부는 초겨울이 찾아오면, 아버지는 마당에서 든든하고 기분 좋은 목소리로 외치셨다. “오늘은 벌꿀 뜨는 날이다!” 옹기 항아리와 뭉툭한 나무 숟가락을 챙겨 들고 아버지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아버지는 벌통을 열고 향긋하고 진한 꿀을 조심스레 떠내셨다. 하지만 결코 욕심을 부려 다 거두지 않으셨다. 벌들이 모진 추위를 견디고 무사히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딱 절반은 남겨두셨다. 겨울철 감기에 걸려 콜록콜록 기침을 할 때면, 아버지는 귀하게 모아둔 그 토종꿀을 나무 숟가락 가득 떠서 어김없이 입에 쏙 넣어주셨다. 달콤하고 진한 꿀 한 숟갈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 기침도 잦아들고 온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자연이 베푼 몫을 감사히 거두고 작은 미물의 생명까지 보살피던 아버지의 넉넉한 마음과 그 달콤한 꿀맛은, 내 가슴속에 깊이 심어진 평생의 따뜻한 가르침이었다.
담배 건조장과 삼베틀, 땀으로 익어간 시절
어린 티를 벗고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키가 자라듯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생각도 깊어지던 시절이었다. 여름날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가 생각날 때면, 부모님은 내 손에 보리쌀을 듬뿍 담아 쥐여주셨다. 돈이 귀하던 때라 곡식과 과일을 맞바꾸는 살가운 물물교환 심부름이었다. 보리쌀을 품에 안고 발걸음도 가볍게 복숭아 과수원으로 향했다. 주인 어르신께 보리를 건네드리면, 어르신은 기특하다며 갓 딴 붉고 단내 나는 복숭아를 넉넉하게 얹어주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입안 가득 번지던 달콤한 복숭아 향기와 심부름을 마친 나를 보며 웃으시던 부모님의 얼굴은 청소년기 기억 속 가장 향긋한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그 시절 우리 집 밤을 채우던 가장 익숙한 소리는 어머니의 삼베틀 소리였다. 어머니는 낮에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이웃집 선노댁과 마주 앉아 무릎이 닳도록 삼을 째고 이으며 길쌈을 하셨다. 마당에 왕겨(새겻)를 피워놓고 뭉근하게 올라오는 따뜻한 열기를 쬐어가며 삼베실에 풀칠을 해 실을 단단하고 매끄럽게 먹이셨다. 그렇게 정성스레 장만한 실을 걸고 밤이 깊어지면 어머니는 베틀에 올라앉아 쉴 새 없이 북을 날리셨다. ‘달그락 달그락, 덜컹덜컹.’ 어스레한 등잔불 아래서 한 올 한 올 어머니의 거친 손마디로 짜내려가던 그 고운 안동포. 가족들의 옷을 짓고 살림을 지탱해 주던 그 삼베는 단순한 천이 아니라, 어머니의 끝없는 인내와 묵묵한 사랑 그 자체였다.
겨울이 깊어 마을 앞 하천과 논바닥이 꽁꽁 얼어붙으면 우리는 얼음판의 주인이 되었다. 그때 우리에게 번듯한 스케이트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나무판자 밑에 헌 양동이 테두리에서 뜯어낸 쇠를 덧대어 날을 세운 ‘외발 스케이트’, 우리는 그것을 ‘시게토’라 불렀다. 양손에 굵은 못을 박은 나무 송곳을 쥐고 얼음판을 힘차게 찍으며 앞으로 내달렸다. 외발 위에 서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쌩쌩 바람을 가를 때면 온 세상이 내 발아래 있는 듯 짜릿했다. 볼이 빨갛게 얼고 손끝이 에리도록 추워도 해가 질 때까지 얼음판을 떠날 줄 몰랐다.
할머니 곁을 지키며 효를 배우던 일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찬 바람이 부는 날이면 부엌 아궁이에서 빨갛게 피어난 숯을 조심스레 떠서 할머니 방 화로에 담아 올렸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그 숯불 온기는 방 안뿐 아니라 어린 손자의 마음까지 포근하게 덥혀주었다. 할머니의 길쭉한 놋담뱃대에 진액이 차면, 질긴 식물 덩굴을 구해다 속을 정성껏 쑤셔 말끔히 닦아드리곤 했다. 깨끗해진 담뱃대를 받아 들고 맛있게 한 모금 피우시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던 할머니의 손길은 참으로 따스했다.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을 때, 우리 집에서는 지극한 정성으로 삼년상을 치렀다. 삼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침저녁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 위에 따뜻한 진지를 차려 올리며 조상을 기렸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 예를 다하는 나날들을 통해, 어른을 공경하고 뿌리를 잊지 않는 도리를 가슴 깊이 새겼다.
몸이 자라면서 나는 자연스레 아버지를 돕는 든든한 일손이 되었다. 겨울밤이면 사랑방에 둘러앉아 가마니 틀에 앉아 묵묵히 가마니를 짰고, 볏짚으로 새끼를 꼬며 갈대 돗자리와 건조된 담배를 포장하는 거적을 만들었다. 손바닥이 부르트고 꺼칠해져도 아버지의 짐을 덜어드린다는 뿌듯함이 가슴에 찼다.
여름과 가을의 농사는 한층 더 치열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담배 포기 수를 파악하고, 수확한 넓은 담뱃잎을 새끼줄에 하나하나 정성스레 엮었다. 키보다 훨씬 높은 담배 건조장에 올라가 누님과 내가 양쪽 끝을 각각 붙잡고 호흡을 맞추며 엮은 담배를 건조대 높이 매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팽팽하게 당겨 올리던 담배 새끼줄이 그만 툭 하고 끊어지고 말았다. 순간 중심을 잃은 누님이 높은 건조장 위에서 바닥으로 그대로 떨어지는 아찔한 사고가 일어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던 그 순간은, 농사일의 고단함과 위험을 온몸으로 실감하게 한 잊지 못할 기억이다. 한밤중에도 고추 건조장으로 달려가 연탄불이 꺼질세라 졸린 눈을 비비며 새 연탄을 갈아 넣던 새벽의 차가운 공기까지. 몸은 고단하고 위험이 도사리던 날들이었지만, 흙을 일구고 정직하게 땀을 흘리는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배운 청소년기였다.
전방 GP의 긴장, 흙 묻은 문제집
고향 산청의 품에서 땀의 가치를 배우며 자란 소년은 어느덧 어엿한 청년이 되어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청년의 나이에 마주한 군대는 가장 차갑고 엄혹한 최전방이었다. 나는 비무장지대 최전선 전방 GP에서 34개월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그 시절, 가장 잊히지 않는 기억은 삼청교육대 보급병으로 근무했던 나날들이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잔반통에 버려진 밥찌꺼기를 허겁지겁 주워 먹던 교육생들의 처절한 모습은 인간의 존엄과 시대의 아픔을 가슴 깊이 통감하게 했다.
어느 날은 교육생들이 단체로 탈영하는 일촉즉발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실탄을 장전한 총을 공중에 쏘아 위협하며 가까스로 상황을 진정시켰던 그 아찔한 순간은, 지금도 생생한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격동의 세월 한가운데서 군복을 입고 보낸 34개월은, 청년의 나를 한층 더 단단하고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벼려낸 시간이었다.
34개월의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제대했을 때, 내 앞에는 진로의 갈림길이 놓여 있었다. 고심 끝에 대학 진학 대신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세웠다. 곧장 읍내 서점으로 달려가 손때가 묻도록 볼 적중문제집 한 권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가난한 농가의 현실은 책상 앞에 온전히 앉아 공부에만 매달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바쁜 일손부터 좀 거들어라.” 부모님의 재촉에 나는 일과 공부를 결코 분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낮에는 마당에서 부모님과 함께 담뱃잎을 새끼줄에 엮으며 머릿속으로 공식을 외우고 법조문을 되뇌었다. 손에는 흙과 담배 진액이 까맣게 묻어 있었지만, 눈과 가슴은 책장 속 활자를 치열하게 좇았다. 그 간절함과 땀방울 덕분이었을까. 공부를 시작한 지 단 6개월 만에 9급 공무원 시험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쥐는 기적 같은 결실을 보았다.
공직에 첫 발령을 받고 마침내 손에 쥐었던 첫 월급봉투, 그 안에는 8만 5천 원이라는 귀한 돈이 들어 있었다. 손에 쥐기조차 조심스러웠던 그 소중한 돈을 들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시장의 속옷 가게였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흙을 파고 땀을 흘리시느라 변변한 옷 한 벌 제대로 걸치지 못하셨던 부모님. 두 분을 위해 빨갛고 두툼한 내의 한 벌씩을 정성스레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내의를 받아 들고 손으로 가만히 쓸어내리시며 눈시울을 붉히시던 부모님의 그 표정은, 내 평생의 가장 큰 보람이자 잊을 수 없는 긍지였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서 부모님의 노고에 바친 첫 보답이었고, 공직자로서 걸어갈 첫걸음의 벅찬 다짐이었다.
청렴의 길, 명예로운 훈장
8만 5천 원의 첫 월급으로 시작된 공직자의 길은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졌다. 주민들의 삶을 보살피고 지역의 살림을 가꾸며, 나는 단 하루도 공직자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 스스로를 엄격히 경계했다. 공직이라는 자리는 내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주민을 섬기는 자리라는 신념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숱한 유혹과 격무의 파도 속에서도 단 한 번의 징계나 과오 없이 35년을 올곧고 청렴하게 완주했다.
정년퇴임을 맞이하던 날, 가슴에 달린 대한민국 정부훈장은 그 오랜 세월 동안 묵묵히 흘렸던 땀과 정직함에 대한 가장 값진 증표였다.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성실과 원칙 하나로 지켜낸 35년의 세월이 그 작은 훈장 안에 고스란히 빛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멍석 위에서 별을 헤아리던 가난한 산청의 소년이, 담뱃잎을 엮으며 주경야독하던 청년을 지나, 35년 공직의 무게를 명예롭게 내려놓기까지 모든 순간이 기적이고 은혜였다. 이제 훈장을 가슴에 품고 공직을 마친 나는 또 다른 현장에서 제2의 인생을 힘차게 열어가고 있다.
어린 시절 산청 골목길에서 동무들과 함께 배웠던 양보와 규칙, 부모님께 배운 정직한 노동의 가치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온전히 설 수 있었다.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적어 내린 이 기록은 내 삶의 소중한 뿌리이자,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밝혀주는 나침반이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넓고 깊은 세상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