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에는 세상이 참 단순한 줄 알았다. 내가 남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땀 흘리면 세상도 나를 속이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묵묵히 내 자리에서 요령 피우지 않고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언젠가는 그 정직함에 걸맞은 넉넉한 보상이 자연스레 찾아올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세상살이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이고, 결국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웃게 되는 법이라는 소박한 믿음 하나로 청춘의 시간들을 채워 넣었다. 그러나 세월은 내가 정직하게 디딘 발걸음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아침 세수를 하다 거울 속에 비친 사내를 보았다. 푸석하게 메마른 피부, 이마와 눈가에 선 깊게 패인 주름, 그리고 언제 이렇게 내려앉았는지 모를 희끗희끗한 흰머리. 거기에는 꿈 많던 청년은 간데없고, 세상의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지칠 대로 지친 한 중년의 얼굴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거울 속의 그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자문해 보았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 온 것일까. 내가 믿었던 착하고 정직한 삶은 나를 어디로 데려다주었는가.’ 물음은 차가운 거울 표면에 부딪혀 공허하게 흩어졌다. 지갑을 열면 빳빳하지도 않은 명함 한 장이 들어 있다. 회사 생활 수십 년에 손에 쥔 직함은 ‘계장’. 사람들은 흔히 나이가 차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그럴듯한 감투를 쓰는 것을 성공의 척도로 삼는다. 동창 모임이라도 나가면 그 격차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누구는 박사 학위를 받아 대학에서 점잖게 강단을 지키는 ‘교수님’이 되어 있고, 누구는 번듯한 사업체를 일구어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회장님’ 소리를 듣는다. 번쩍이는 양복을 입고, 고급 승용차의 차 키를 식탁 위에 무심하게 올려놓으며 큰소리로 세상을 논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낀다. 그들이 호기롭게 가는 2차, 3차 술자리는 내게 결코 가벼운 자리가 아니다. 계산서가 오갈 때쯤이면, 나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과 위축감에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고 신발 끈을 고쳐 묶는다. 묶어도 묶어도 풀리지 않는 내 인생의 매듭처럼, 풀리지도 않은 신발 끈을 만지작거리며 동전 몇 푼 세듯 자존심을 숨겨야 했던 그 순간의 씁쓸함을 누가 알까. 그럴 때마다 골목길 어귀에 서서 태우는 담배 한대. 밤하늘로 흩어지는 연기는 못난 사내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텅 빈 하늘을 쳐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어 보지만, 밤하늘은 그저 아득하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들려주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 구겨 넣은 오천 원짜리 로또 복권 한 장. 한 줄기 허황된 요행이라도 바라지 않으면 이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옮길 힘조차 나지 않던 날들이었다. 매달 월급날이 지나고 며칠만 지나면 통장 잔고는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아이 교육비, 공과금, 빠듯한 생활비에 깎여 나간 통장 숫자를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온다. ‘남들은 저만치 앞서서 계절을 바꾸어가며 달려가는데, 왜 나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걸까.’ 대학 문턱도 넘어보지 못했다는 자격지심, 남들처럼 유창하게 말을 꾸며내거나 그럴듯한 문장을 구사하지 못한다는 열등감은 이따금씩 나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던 것일까? 내가 지켜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남을 밟고 일어서지 않았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며 쌓아 올린 성공도 없었다. 요령 피우지 않고 남들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해 묵묵히 땀 흘렸고, 부정한 유혹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내 몫의 밥벌이를 해왔다. 비록 명함에 박힌 직함은 작을지언정, 그 명함에 묻은 땀방울만큼은 세상 누구의 것보다 깨끗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 땀방울이 모여 마침내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작지만 눈부신 우리 집 문패가 되었고, 내 사람들을 지켜내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었다. 터덜터덜 무거운 다리를 끌고 현관문 앞에 선다. 주머니 속 열쇠를 돌리고 문을 열면, 하루 동안 짊어졌던 세상의 차가운 무게가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기적이 시작된다.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다 말고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는 아내. 그 거친 손으로 내 겉옷을 받아주며 "오늘도 고생 많았어요"라고 건네는 그 짧은 한마디에 온몸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 그리고 저 방에서부터 우다다 달려와 내 품에 와락 안기는 딸과 쌍둥이 두 아들. 세상 물정 모르는 맑은 눈망울로 "우리 아빠 최고!"라며 목을 끌어안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이란 대체 무엇인가. 교수라는 번듯한 직함인가, 회장이라는 거대한 권력인가, 아니면 술값을 척척 내며 뽐내는 두툼한 지갑인가. 그것들이 아무리 화려한들, 나를 이토록 온전하게 믿어주고 내 존재 자체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바라봐 주는 가족의 눈빛과 바꿀 수 있을까. 오천 원짜리 로또의 일등 당첨보다 내 품에 안긴 이 작은 아이의 온기가 훨씬 더 눈부시고 소중하다. 번쩍이는 외제차나 높은 자리가 없어도, 현관문을 열었을 때 따뜻한 밥 냄새와 함께 나를 반겨주는 온기가 있는 한, 나는 결코 가난한 패배자가 아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며, 내 왕국의 온전한 주인이다. 거울 앞에 다시 선다. 지치고 주름진 얼굴 너머로, 험난한 세월을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해 온 한 사내의 굳은 의지가 보인다. 비록 배움이 짧아 멋들어진 글귀나 화려한 지식으로 나를 포장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남들처럼 그럴듯한 명함을 내밀며 으스댈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삶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정직하게 살아온 내 땀방울이 자랑스럽고, 내 손으로 일군 소박한 울타리가 눈물겹도록 소중하다. 친구들아, 너희가 높은 자리에서 세상을 내려다볼 때, 나는 낮은 곳에서 정직하게 삶의 무게를 버텨냈다. 너희의 성공이 눈부시듯, 내 묵묵한 세월 또한 그 자체로 당당하고 아름답다. 굽었던 허리를 곧게 펴고, 움츠러들었던 어깨를 활짝 젖힌다. 신발 끈을 다시 단단히 동여맨다. 이번에는 숨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차게 대지를 딛고 나아가기 위해서다. 문밖으로 나서는 내 발걸음은 더 이상 터덜거리지 않는다. 그래, 나는 오늘도 가족의 울타리이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 ‘아빠’다. 어깨를 활짝 펴고, 가슴을 내밀며, 나는 오늘 하루를 향해 씩씩하고 당당하게 걸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