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했던 직함과 일상의 궤도가 사라진 자리에는 서늘한 공허가 먼저 찾아들었다. 세상은 여전히 빠르게 돌아가는데 나만 홀로 멈춰 서 있는 듯한 조급함 속에서, 지금 내게 가장 절실한 것은 당장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마음을 가만히 보듬어 줄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조용한 거실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으니, 지난 세월의 치열했던 흔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자정이 넘도록 꺼질 줄 모르던 사무실의 불빛 아래, 오직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는 묵직한 사명감 하나로 청춘의 밤낮을 지새우던 날들이었다. 연일 이어지는 야근과 무거운 책임감 속에서도 내 손으로 세상의 기틀을 묵묵히 받치고 있다는 보람이 있었기에, 뼈아픈 피로조차 긍지로 삼으며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뜨거웠던 헌신의 이면에는 차마 지우지 못할 애틋한 빚이 남아 있었다. 공직에 모든 열정을 쏟아붓느라 정작 가장 따스하게 품어주어야 할 가족의 곁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했던 미안함이다. 곤히 잠든 아이들의 얼굴만 겨우 쓸어보고 새벽길을 나서야 했고, 늦은 밤 홀로 거실을 밝히며 나를 기다리던 아내의 고단한 숨결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나의 헌신 뒤에는 늘 말없이 견뎌준 가족들의 깊은 인내와 희생이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익숙했던 동료들의 얼굴과 가족들의 따뜻한 눈빛을 하나둘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돌아보면 참으로 치열했고, 더없이 고마운 세월이었다. 이제 일터를 내려놓고 홀로 멈춰 서 있지만, 공직에 바쳤던 땀방울과 가족들이 건네준 깊은 사랑은 결코 흩어져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땅속 깊이 뻗어 내린 단단한 뿌리가 되어, 앞으로 살아갈 내 삶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고스란히 숨 쉬고 있었다.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 한 구절이 가슴속에 잔잔히 밀려들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그렇다. 세상천지에 비바람 없이 피는 꽃이 없듯, 퇴직 뒤 마주한 낯선 멈춤 또한 내 삶이 더 깊은 뿌리를 내리기 위한 필연적인 담금질의 시간이었다. 마음의 중심을 잡은 나는 서늘한 공허에 머물러 있는 대신 새로운 배움의 길로 씩씩하게 나아갔다.
사회의 그늘진 곳을 따스하게 보듬고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고, 마음의 결을 먹빛과 고운 선으로 표현하는 캘리그라피를 익혔으며, 그윽한 커피 향으로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는 바리스타 자격증까지 손에 쥐었다. 배움은 멈추어 있던 내 삶의 시계를 다시 뛰게 한 힘찬 동력이었다.
이 소중한 배움과 공직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순여덟이 되기까지 대한노인회 영양군지회에서 일하며 지역 어르신들을 정성껏 섬겼다. 같은 길을 앞서 걸어가신 분들의 손을 맞잡고 그분들의 일상에 작은 온기를 보태는 시간은, 청춘의 격무와는 또 다른 깊은 보람과 긍지를 안겨주었다. 배움과 나눔으로 가득 채워간 그 시간들이야말로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제2막의 꽃봉오리였다.
대한노인회에서의 소임을 다하고 이제 일흔의 문턱에 서서, 나는 또 다른 새로운 길을 담담하고도 설레는 마음으로 마주한다.
젊은 날의 공직 헌신이 내 삶의 단단한 ‘뿌리’였고, 예순여덟까지의 배움과 노인회 현장에서의 나눔이 활짝 피어난 ‘꽃’이었다면, 일흔 이후의 삶은 그 모든 세월이 원숙하게 익어 퍼져나가는 ‘그윽한 향기’의 계절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이제 요양보호사 자격증에 도전하여, 같은 시대를 살아온 동년배 어르신들의 손을 맞잡고 서로의 아픔과 외로움을 보살피는 ‘노노케어(老老 Care)’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자 한다. 나와 같은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온 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기에, 그들의 벗이자 따뜻한 동행이 되어주고 싶다.
여기에 틈틈이 갈고닦은 캘리그라피의 붓끝으로 이웃들에게 희망의 글귀를 전하고, 향긋한 커피 한 잔을 내리며 주변의 소중한 인연들과 온정을 나눌 것이다. 평생을 묵묵히 곁을 지켜준 아내의 손을 잡고 계절의 변화를 음미하는 여유 또한 잊지 않을 것이다.
‘늦게 피는 꽃도 향기를 품듯이.’
잠시 멈춰 섰던 내 삶의 길 위로 한 줄기 따스한 햇살이 비쳐 오듯, 일흔 이후의 날들은 더욱 깊고 환하게 피어날 것이다. 지나온 모든 인연과 세월에 감사하며, 나는 나만의 향기를 품고 다시금 정갈하고 굳건하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