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절이 자산이다」에서 이어지는 두 번째 노트

글: 신치훈

결핍의 탄식을 넘어: 없는 것을 탓하는 눈, 꿰어내지 못하는 손

영양에 살며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영양에는 내세울 관광지가 없다”는 자조(自嘲)입니다. 번듯한 대형 리조트도 없고, 바다를 낀 화려한 유원지도 없으며,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번화가도 없다는 푸념입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거대한 시설이 들어서야만 비로소 관광이 시작된다고 믿으며, 도시의 잣대로 이 고요한 산골을 ‘결핍의 땅’으로 규정하곤 합니다. 일각에서는 편의시설과 즐길 거리가 부족한 산골에 무작정 자연만 보러 오라는 것은 현실 물정을 모르는 감상주의이자 손님에게 불편을 강요하는 일이라며 고개를 젓기도 합니다.

그러나 관광의 역사가 증명하는 진실은 정반대입니다. 넘쳐나는 테마파크와 인공 조형물은 자본만 있으면 어디서나 복제할 수 있지만, 수백 년 동안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원형의 자연과 침묵은 돈으로 지어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자산입니다. 영양에 ‘관광 자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손에 쥐어진 천혜의 구슬들을 꿰어낼 ‘서사의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시의 잣대로 결핍을 한탄하기를 멈추고 영양의 본래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번쩍이는 네온사인이 없기에 하늘의 별이 온전히 쏟아지고, 시끄러운 유흥이 없기에 숲의 숨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없는 것을 탓하던 자조는, 가장 순수한 원형을 지켜왔다는 당당한 발견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영양의 밤하늘과 고즈넉한 한옥 마을

세계가 사는 것은 콘크리트가 아니라 ‘장면과 서사’다

뉴질랜드의 작은 호숫가 마을 테카포와 칠레의 메마른 아타카마 사막, 그리고 일본 나가노현의 산골 마을 아치무라를 찾아가는 전 세계 수십만 명의 여행자들은 무엇을 보러 그 먼 길을 떠나는 것일까요? 그곳에 거대한 놀이공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돈을 지불하고 사는 것은 천문대라는 콘크리트 건물이 아니라, ‘세상의 소음과 빛에서 완전히 차단된 채 은하수와 독대하는 하룻밤의 감정과 장면’입니다.

혹자는 테카포나 아타카마 같은 세계적 명소의 압도적인 대자연과 영양의 작은 산골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비약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지역들도 처음부터 화려한 관광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오직 하나, 자신들이 가진 ‘어둠과 별’에 이야기를 입히고, 그것을 찾아오는 사람의 마음에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으로 각인시킨 것입니다. 관광은 땅의 크기를 겨루는 체급 싸움이 아니라, 감동을 엮어내는 서사의 밀도 싸움입니다.

영양은 이미 아시아 최초로 지정된 ‘국제밤하늘보호공원’을 품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수준의 어둠을 공인받았음에도 우리가 그것을 체감하지 못했던 것은, 그 어둠을 하나의 감성적 브랜드로 벼려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진 한 장에 담긴 고요, 짧은 문장 한 줄이 건네는 위로, 불을 끄는 순간 시작되는 우주와의 만남. 세계인이 반응하는 것은 거대한 인공물이 아니라, 바로 그 한 장면이 건네는 영혼의 떨림입니다.

흩어진 구슬을 꿰는 법: 칠흑의 밤, 숲의 침묵, 350년의 밥상

영양에는 이미 보석 같은 구슬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어두운 밤하늘과 그 어둠 속에서 춤추는 반딧불이가 있고,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수비면 자작나무 숲길이 있습니다. 밭에서 갓 뜯어 올린 일월산의 향긋한 산나물이 있고, 350년 전 장계향 선생이 한글로 남긴 아시아 최초의 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정갈한 내림손맛이 두들마을 툇마루에 살아 숨 쉽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영양 관광은 이 구슬들이 제각기 파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천문대는 밤에 잠깐 들르고, 숲길은 낮에 걷다 떠나며, 음식은 그저 한 끼 때우는 식사에 머물렀습니다. 자원이 점(點)으로 흩어져 있으면 여행자는 몇 시간 만에 영양을 스쳐 지나가 버리고, 머물지 않는 관광은 지역에 생명력을 불어넣지 못합니다.

흩어진 구슬을 꿰어 보배로 만드는 길은 하루의 시간표를 하나의 완결된 서사로 엮는 데 있습니다. 낮에는 인공 소음이 완전히 멈춘 숲길을 걸으며 귀를 씻어내고, 저녁에는 가마솥에 지어낸 산채 솥밥과 순한 찌개로 밭의 흙향을 음미하며, 밤에는 모든 인공 불빛을 끄고 쏟아지는 은하수 아래 오롯이 서서 인생의 사진 한 장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고택의 따뜻한 툇마루에서 350년의 지혜가 담긴 밥상으로 몸을 깨웁니다. 이것은 단순한 코스의 나열이 아니라, 도시의 자극에 지친 인간의 오감(五感)을 정화하고 채워주는 ‘치유와 회복의 완결된 드라마’입니다.

영양의 숲길과 정갈한 산채 밥상

오지(奧地)가 아닌 안식처(Refuge)로: 고립을 프리미엄으로 바꾸다

영양은 서울에서 대중교통으로 네 시간 넘게 걸리는 먼 곳입니다. 철도도 바로 닿지 않고 고속도로에서도 한참을 벗어나 산길을 돌아 들어와야 합니다. 오랫동안 이 ‘물리적 거리’는 영양 발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극복할 수 없는 약점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오가는 길이 힘들면 결국 사람들은 더 가깝고 편한 곳으로 발길을 돌릴 것이라는 우려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선 글 「단절이 자산이다」에서 짚었듯, 영양의 끊긴 길은 결핍이 아니라 깊은 사유의 조건이었습니다. 관광에서도 이 법칙은 그대로 통합니다.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에는 결코 머물지 않는 깊은 고요가, 오직 멀리 찾아온 사람에게만 허락되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번쩍이는 불빛과 끊임없는 스마트폰 알림, 피로한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영양의 먼 거리는 장애물이 아니라 ‘속도를 늦추고 들어오는 정화의 순례길’이 됩니다. 안동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영양의 굽이진 산길로 들어서는 순간, 손님은 비로소 세상과의 번잡한 접속을 끊고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자발적 고립의 안식처(Refuge)’로 진입합니다. 물리적 단절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직 영양에서만 누릴 수 있는 절대적 고요의 가치’로 선언할 때, 영양의 먼 거리는 도리어 가장 강력한 매력이 됩니다.

별빛 아래 따뜻한 차와 환대를 나누는 고택의 밤

자부심이 짓는 브랜드: 400년의 고요가 세계의 위로가 될 때

관광은 산천을 파헤치고 콘크리트를 붓는 토목 사업이 아닙니다. 관광의 본질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삶의 태도와 서사를, 먼 곳에서 찾아온 이에게 정성스럽게 건네는 ‘환대(Hospitality)의 인문학’입니다. 외지인을 무분별하게 끌어들여 고유의 청정함을 훼손하는 대량 소비 관광은 우리가 갈 길이 아닙니다. 영양의 어둠과 침묵을 온전히 존중하는 여행자를 모셔, 깊은 울림을 나누는 성숙한 교감이 중심에 놓여야 합니다.

조선 후기 갈암 이현일이 학통의 매듭을 묶고, 조지훈과 오일도, 이문열이 깊은 문장을 길어 올렸던 이 ‘단절의 향(鄕)’은 이제 다음 100년의 인간을 위로하는 치유의 산실이 되어야 합니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가리키는 마을 해설사의 나직한 목소리, 씨앗을 뿌리고 나물을 무쳐내는 농부와 종부의 투박하지만 따뜻한 손길 속에 영양의 서사가 살아 숨 쉽니다.

우리가 지켜온 이 어둠과 고요를 결핍이 아닌 시대의 가장 귀한 유산으로 당당히 긍정할 때, 가장 외진 산골 영양은 국경을 넘어 세계인이 제 영혼을 쉬어가는 가장 눈부신 은하수의 고향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