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을 갈고 나면 이랑을 다듬고 거름을 낸다. 어린 고추 뿌리가 잘 내릴 수 있도록 흙을 부드럽게 만들고, 작물이 자라는 데 필요한 힘을 땅속에 채워 넣는다. 겉으로 보면 그저 흙을 뒤집고 고랑을 내는 일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농사를 짓는 내게는 한 해의 바탕을 만드는 중요한 시간이다. 봄에 땅을 어떻게 만들어 놓느냐에 따라 고추의 뿌리 내림과 자라는 힘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반듯하게 다듬은 이랑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직 심지도 않은 고추가 무성하게 자란 모습이 떠오른다. 올해는 병 없이 잘 자라 줄지, 비와 바람을 잘 견뎌 줄지 생각하다 보면 기대와 걱정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농사가 사람 뜻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해마다 겪으면서도 봄만 되면 또다시 좋은 결실을 바라게 된다. 아마 그 마음이 나를 다시 밭으로 불러내는 것 같다.

모종을 심고 나면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어린 모종이 새 땅에 제대로 뿌리를 내렸는지 살피고, 쓰러지거나 시든 것은 없는지 밭을 오가며 들여다본다. 새잎이 돋고 줄기에 힘이 붙는 것을 보면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인다. 말 못 하는 작물이지만, 날마다 살피다 보면 어디가 불편한지 무엇이 필요한지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고추를 키운다고 하지만, 사실은 고추와 내가 서로의 때를 맞추어 가는 셈이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깊어지면 밭은 빠르게 푸르러진다. 가지마다 잎이 무성해지고 하얀 꽃이 피었다 진 자리에는 어린 고추가 매달린다. 처음 맺힌 작은 고추를 발견하는 날에는 봄부터 들인 수고가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아 반갑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여린 열매 하나가 농부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 준다.

그러나 여름 고추농사는 한시도 마음을 놓기 어렵다. 비가 오래 내리면 뿌리가 상할까 걱정되고, 햇볕이 너무 뜨거우면 잎과 열매가 견디지 못할까 염려된다. 병충해의 기색은 없는지 살피고, 쓰러진 줄기와 상한 열매도 들여다봐야 한다. 날씨가 심상치 않은 날이면 집에 있어도 마음은 밭에 가 있다. 비가 많이 와도 걱정이고, 비가 오지 않아도 걱정이다. 농사는 늘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일이다.

때로는 애써 돌본 고추가 병들거나 열매가 제대로 크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속상하고 허탈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해도 자연이 허락하지 않으면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다. 살릴 수 있는 것은 살리고, 지킬 수 있는 것은 끝까지 지켜야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밭을 오가다 보면 고추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 인내심도 조금씩 깊어진다.

무더운 여름과 긴 장마를 지나 밭에 하나둘 붉은빛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수확할 때가 왔음을 알게 된다. 초록 잎 사이에서 붉게 익은 고추를 발견할 때의 기쁨은 직접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이라야 제대로 알 것이다. 고추 하나를 손에 쥐면 흙을 갈던 봄날부터 마음 졸였던 여름날까지, 그동안의 시간이 함께 잡히는 듯하다.

고추를 따는 일은 생각처럼 수월하지 않다. 허리를 굽혔다 펴는 일을 거듭하다 보면 온몸이 뻐근해지고 손끝도 아파 온다. 햇볕 아래에서 땀이 흘러도 익은 고추는 때를 놓치지 않고 거두어야 한다. 힘이 들다가도 바구니에 붉은 고추가 하나둘 쌓이는 모습을 보면 다시 손에 힘이 난다. 알이 굵고 빛깔 좋은 고추를 만나면 반갑고, 상하거나 제대로 여물지 못한 고추를 보면 안타깝다. 같은 밭에서 자라도 열매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수확할 때마다 느낀다.

마당에 붉은 고추를 펼쳐 놓고 바라보면 마음 한구석이 뿌듯해진다. 그것은 열매의 양만으로 헤아릴 수 있는 기쁨이 아니다. 새벽부터 밭에 나갔던 날과 날씨 때문에 잠을 설쳤던 밤, 말없이 흘린 땀이 그 붉은빛 속에 함께 들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 무더기의 고추일지 몰라도 내게는 봄부터 가을까지 쌓인 시간이며, 땅과 내가 함께 만들어 낸 한 해의 결실이다.

마지막 고추를 거두고 나면 그렇게 무성하던 밭도 차츰 고요해진다. 줄기와 잎은 말라 가고, 밭고랑을 지나는 바람에서는 어느덧 찬 기운이 느껴진다. 빈 밭을 바라보면 수확을 마쳤다는 홀가분함보다 아쉬움이 먼저 남는다. 잘된 일도 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은 일도 떠오른다. 비가 너무 잦았던 때, 병충해 때문에 마음을 졸였던 순간, 조금 더 잘 살폈으면 좋았을 자리도 돌아보게 된다.

그래도 농사에는 헛된 경험이 없다. 잘된 일은 다음 해의 자신감이 되고, 잘못된 일은 다음 농사를 위한 가르침이 된다. 올해 밭에서 얻은 것을 마음에 새기다 보면 어느새 내 생각은 다음 봄으로 가 있다. 땅을 어떻게 만들지, 모종을 어떻게 돌볼지, 올해 아쉬웠던 것을 어떻게 보완할지 하나씩 헤아리게 된다.

고추농사를 지으면서 나는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서두른다고 열매가 빨리 익는 것도 아니고, 애를 쓴다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제때 해 놓은 뒤에는 땅의 힘과 작물의 생명력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 그 기다림 속에는 기대도 있고 걱정도 있으며, 때로는 실망도 있다. 하지만 가을에 붉게 익은 고추를 마주하면 그 모든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해 농사가 끝나면 몸은 고단해도 마음속에는 다시 시작할 힘이 남는다. 겨울 동안 밭은 쉬지만 농부의 생각까지 쉬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에는 벌써 다음 봄의 이랑이 놓이고, 그 위에 튼튼한 고추 모종이 한 포기씩 심어진다. 고추농사는 수확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한 해의 수고를 가슴에 품고, 다시 흙을 믿으며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