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열차는 곧 제천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차내 안내가 흐르자 기차는 서서히 속도를 늦춘다. 창밖으로 여러 갈래의 철로가 들어온다. 나란히 달리던 선로가 어느 순간 갈라지고, 멀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오래전 어느 밤으로 돌아간다.
그때 나는 야간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열차가 대전역에 잠시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객차에서 내렸다. 당시에는 열차를 타는 플랫폼에 포장마차처럼 차려 놓은 우동집이 있었다. 나는 짧은 정차 시간을 놓칠세라 그곳으로 달려가 뜨거운 우동 한 그릇을 서둘러 먹었다. 천천히 맛을 음미할 겨를은 없었다. 열차가 떠날까 마음을 졸이며 국물까지 급히 삼키고는 다시 객차로 뛰어올랐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를 찾아 앉았을 때에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목적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도시의 이름도, 열차표에 적혀 있던 도착역도 까마득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전역 플랫폼의 우동집과 그곳에서 급히 먹었던 우동 한 그릇, 다시 열차에 오르던 다급한 발걸음은 아직 마음 한쪽에 또렷이 남아 있다.
분명 좋은 일 때문에 가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리운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두운 밤을 가르며 달리는 열차 안에서 그토록 마음이 앞설 수 있었을까. 도착할 곳이 있다는 것, 그곳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밤길은 외롭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은 많은 것을 지워 버린다. 어디로 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조차 희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플랫폼에서 먹었던 뜨거운 우동 국물의 온기와 짧은 정차 시간, 다시 출발하는 열차의 흔들림처럼 기억의 밑바닥에 오래 남는 것들이 있다. 사실은 잊혀도 그날의 마음은 남는다.
제천역에 다다른 기차가 천천히 멈춘다.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나는 창밖에 길게 뻗은 철로를 바라본다. 저 수많은 선로처럼 내 삶에도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길은 또렷이 기억나고, 어떤 길은 어디로 이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날 내가 찾아가던 것은 어느 도시나 한 사람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가슴을 뛰게 하는 약속,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는 설렘, 내일에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믿음. 나는 아마 그런 것들을 향해 밤새 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목적지는 잊었다. 그러나 그곳을 향해 가던 마음까지 잊은 것은 아니다.
오늘 기차가 다시 철로 위를 달리는 동안, 까마득히 멀어진 그날의 내가 잠시 내 곁에 앉는다. 그리고 말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철로 끝에서, 오래전에 두고 온 그리움이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