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람을 맞고 있으면 오래전에 사라진 시골길 하나가 다시 나타난다. 반듯하게 닦이지 않은 비포장길이었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흙먼지가 일었고,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줄지어 피어 있었다. 가느다란 꽃대는 바람이 불 때마다 한쪽으로 몸을 기울였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 길을 나는 한 아이와 함께 걸었다. 단발머리에 눈이 맑은 동네 소녀였다. 친한 동무였지만,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가까운 사이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특별히 어디를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함께 걷기 위해 그 길을 걸었던 것 같다. 같은 길을 나란히 걷고, 가끔 눈이 마주치면 까닭 없이 웃었다. 그것만으로 하루가 충분했다.

아이는 길가의 코스모스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단발머리가 가을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맑은 눈에는 푸른 하늘이 담겨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열면 마음과 아무 상관없는 말만 나올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아이도 묻지 않았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마음에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도리어 사라질 것 같은 것이 있었나 보다. 우리는 그저 고추잠자리가 날아가는 쪽을 함께 바라보았다. 잠자리는 코스모스 꽃잎에 잠깐 내려앉았다가 손을 뻗기도 전에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좋아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내일도 오늘처럼 함께 걸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늘 곁에 있는 것이 언젠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소중한 마음일수록 서둘러 이름 붙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중학교 진학을 위해 동네를 떠나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줄 알았던 길과 아이를 두고 가야 했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떠난다는 것이 무엇을 잃는 일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아이와 마주 섰을 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 있으라는 말도, 잊지 말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단발머리 아래의 맑은 눈만 오래 바라보았다. 아이도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에 무슨 말이 담겨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아이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만 믿었다. 함께 걷던 비포장길과 길가의 코스모스, 높고 푸른 하늘과 고추잠자리,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마음이 모두 그 눈빛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얼굴을 만났고, 많은 길을 걸었다. 오래 기억하려 애써도 흐려지는 얼굴이 있는가 하면,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순간에 선명하게 돌아오는 얼굴도 있다. 그 아이의 얼굴이 그랬다. 이름보다 먼저 단발머리가 떠오르고, 목소리보다 먼저 맑은 눈이 떠올랐다.

이제 비포장길은 자취를 감추고 길가를 메웠던 코스모스도 예전처럼 흔하지 않다. 그러나 가을이 오면 그 길은 어김없이 내 마음속에 다시 열린다. 하늘이 높고 푸른 날,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바람을 타고 지나가면 나는 어느새 어린 시절의 그 길 위에 서 있다.

그곳에는 여전히 단발머리의 아이가 있다.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걷고 있다. 세월이 이토록 흘렀는데도 마음속의 아이는 조금도 나이 들지 않았다.

우리가 정말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알고 있다고 믿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어린 날의 마음은 사실로 밝혀져야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해서 더 오래 남는 마음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아서 세월 속에 더 맑아지는 인연도 있다.

가을바람이 불어온다. 코스모스가 보이지 않는 길가에서도 꽃잎 흔들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푸른 하늘 아래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멀리 날아간다.

나는 그 작은 붉은 날개를 바라보며, 그날 하지 못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건넨다.

잘 지내고 있니.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다만 신선한 바람이 한 번 더 얼굴을 스치고, 고추잠자리는 푸른 하늘 저편으로 천천히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