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는 이곳을 그렇게 불렀다. ‘맑고 맑은 물이 흐르는 굽이’라는 뜻이다. 그 이름에는 이 계곡의 모습과 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눈으로 보면 물이 맑았고, 귀를 기울이면 맑은 소리가 났다. 물은 한 굽이를 돌아 또 한 굽이로 흘렀고, 그 흐름을 따라 우리의 어린 날도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거센 물살은 오랜 세월 바위를 깎고 또 씻었다. 그렇게 드러난 바위는 희다 못해 백옥 같았다. 물에 젖은 검은 바위 사이로 흰 포말이 터지면 계곡 한복판에 눈부신 길이 열리는 듯했다. 그 곁에는 푸르디푸른 소나무가 가지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세월을 품은 낙낙장송은 물소리 위에 짙은 그늘을 얹어 주었다.

한낮이면 폭포수가 햇빛에 부서졌다. 물속의 물고기들은 빠른 여울과 잔잔한 못을 오가며 한가로이 뛰놀았다. 우리도 그 물가를 놀이터 삼아 노닐었다. 무엇을 가져야 즐거운 줄도 몰랐고,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다. 맑은 물과 바위, 소나무와 물고기만으로 하루가 넉넉했다. 돌이켜보면 가난하거나 모자란 날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진 날들이었다.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 다시 이곳을 찾았다. 세월은 나를 먼 길로 데려갔지만 청청모레기는 그 자리에서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물은 바위를 넘어 하얗게 부서졌고, 바위는 묵묵히 물살을 받아 냈다. 산을 가득 메운 나무들은 깊은 초록으로 계곡을 감싸고 있었다. 지금 보아도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오래 바라보고 있으니, 그대로인 것은 풍경만이 아니었다. 물소리를 듣는 순간 내 안에 남아 있던 어린아이도 다시 눈을 떴다. 바위에서 바위로 건너가며 웃던 마음, 흐르는 물만 보아도 하루가 즐거웠던 마음이 세월의 더께를 밀어내고 잠시 내 곁으로 돌아왔다. 내가 이곳을 기억해 온 줄 알았는데, 어쩌면 이곳이 오래도록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청청모레기의 물은 오늘도 굽이를 돌아간다. 흘러가면서도 제 길을 잃지 않고, 수없이 부서지면서도 다시 맑아진다. 그 물 앞에 서니 지나온 세월 또한 한 줄기 물처럼 느껴진다. 멀리 흘러온 듯해도 마음의 한 굽이를 돌면 다시 닿는 곳이 있다.

내 어릴 때, 그때 그곳. 청청모레기는 사라진 옛날이 아니라 지금도 흐르는 고향의 한 대목이다. 나는 한동안 그 물소리를 들으며 서 있었다. 그리운 것은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었으나, 고마운 것은 그 시간을 품은 풍경이 아직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