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허리에는 비를 머금은 안개가 내려앉아 있다. 안개는 산의 굽이를 따라 천천히 흐르다가 숲 깊숙이 스며든다. 가까이 있는 나무와 젖은 풀잎은 짙은 초록빛으로 선명하지만, 먼 산은 자취도 없이 안개 속에 잠겼다. 어디까지가 산이고 어디서부터가 하늘인지조차 알 수 없다. 보이지 않는 산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짙은 안개 너머에서 말없이 비를 맞고 있을 것이다.
공원은 한적하다. 사람의 발걸음도, 다급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고요를 가끔 산새가 깨운다. 숲 어딘가에서 맑은 울음 한 자락이 날아왔다가 금세 빗소리 속으로 스며든다. 적막을 깨는 소리가 아니라, 이곳의 고요가 살아 있음을 알려 주는 소리다. 새가 울고 난 뒤의 정적은 오히려 더 깊어진다.
비에 젖은 풀과 나무는 평소보다 빛깔이 짙다. 길가의 작은 잎마다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있고, 그 안에는 흐린 하늘과 산과 숲이 조그맣게 들어앉아 있다. 손끝으로 건드리면 금세 떨어질 만큼 연약하지만, 바라보는 동안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맑고 단단한 빛이다.
수하리의 이 순간은 요란하게 아름답지 않다. 비는 소리 낮춰 내리고, 안개는 말없이 산을 감싸며, 산새는 이따금 제 목소리를 보탤 뿐이다. 그러나 그 조용한 것들이 한자리에 모여 오래 잊히지 않을 풍경을 만든다.
지금 여기에서는 시간이 앞을 향해 달려가지 않는다. 빗방울 하나가 떨어지는 동안 잠시 멈추고, 안개가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만큼 천천히 흐른다. 나는 그 느린 시간 속에 서서, 사라지는 것들이 어째서 이토록 오래 빛나는지를 바라본다. 비가 그친 뒤에도 오늘의 수하리는 마음 한편에서 맑은 빗방울처럼 영원히 반짝일 것이다.
